기업 탐방
[아티(ATI) 기업탐방] 중앙일보 (아트모아 기자단 5기 김유진 기자)
[아티(ATI) 기업탐방] 중앙일보
시각문화에 숨겨진 사회의 단서를 읽다
중앙일보 문소영 논설위원
고전 작품부터 대중문화까지,
이미지에 담긴 사회의 흐름과 이야기를 읽어온 문소영 논설위원을 만나
예술이 오늘의 사회를 어떻게 비추는지 들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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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문소영 논설위원
중앙일보에서 ‘논설위원’으로 활동하고 계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현재 맡고 계신 역할과 주로 다루고 계신 기사 분야를 간략히 소개해주실 수 있을까요?
신문에 실리는 글은 크게 두 가지예요. 하나는 사실을 전달하는 ‘기사’이고, 다른 하나는 필자의 의견이 들어가는 ‘오피니언’입니다. 원래 기사는 기자의 의견이 전혀 들어가지 않은 사실 보도이고, 오피니언은 말 그대로 관점이 담긴 글이에요.
논설위원은 그 중에서 오피니언을 담당합니다. 기본적으로 기자이지만 어느 정도 연차가 쌓이고 자기만의 관점이나 글쓰기 실력을 인정받으면 논설위원이 되는 거죠. 논설위원이 되면 사설과 자기 이름을 단 기명 칼럼을 씁니다. 사설이 신문사의 공식 입장이라면 칼럼은 논설위원 개인의 시선과 해석을 담은 글이라고 할 수 있어요. 물론 요즘은 기사와 오피니언의 경계가 많이 흐려지고 있습니다. 취재 과정에서 어떤 사실을 골라 쓰고 어떤 전문가의 의견을 인용할지 결정하는 순간마다 기자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개입될 수밖에 없으니까요. 그래도 원칙적으로는 기사와 오피니언이 나뉘어 있고, 저는 현재 중앙일보에서 오피니언을 담당하는 논설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기자님께서는 <문화가 암시하는 사회>와 <영감의 원천> 두 시리즈를 통해 꾸준히 글을 연재해오고 계십니다. 두 시리즈 모두 시각문화를 통해 시대와 사회를 읽어낸다는 공통점을 지니지만, 초점이 조금 다르게 느껴집니다. 각각의 시리즈를 집필하실 때 어떤 관점이나 접근법의 차이를 두고 계신지 궁금합니다.
<문화가 암시하는 사회>는 제목 그대로예요. 미술뿐만 아니라 동시대의 온갖 문화, 예를 들면 유행어, TV 프로그램, 광고와 같은 것들을 들여다보면서 거기에 어떤 사회적 함의가 담겨 있는지를 보는 시리즈입니다. 예를 들면 제가 왜 사람들이 ‘절교’나 ‘절연’이 아니라 굳이 ‘손절’이라는 말을 쓰는가를 다룬 적이 있어요. 손절이라는 말이 사실은 주식 용어인 ‘손절매’에서 비롯된 건데, 그게 인간관계에까지 확장돼 쓰인다는 건 지금의 사회적 분위기가 반영된 거잖아요. 그런 식으로 동시대 문화가 품고 있는 우리 사회의 모습을 읽어내는 것이 <문화가 암시하는 사회>의 취지입니다.
반면 <영감의 원천>은 미술 중심이에요. 고전적인 명화나 잘 알려진 미술 작품들이 오늘날 어떻게 패러디되거나 오마주되고 있는지, 그리고 왜 지금까지도 그렇게 강하게 어필되는 지에 초점을 두죠. 이를테면 우리가 매일 쓰는 휴대폰 이모티콘에도 뭉크의 <절규>가 있잖아요. 이런 식으로 고전 미술이 현대 문화 속에서 재해석되는 사례를 보면서 그 작품이 왜 지금까지도 우리에게 영감을 주는지 살펴보는 시리즈가 <영감의 원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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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감의 원천> 밀레이의 ‘오필리아’
<영감의 원천> 시리즈를 읽다보면 미술 작품이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하나의 이야기로 재구성되는 느낌을 받습니다. 기자님께서는 단순한 작품 해설을 넘어, 어떻게 ‘이야기’를 발견하고 풀어내시는지 궁금합니다. 또 이런 글을 쓰실 때 영감을 주는 기자님의 ‘영감의 원천’은 어디에서 비롯되나요?
저는 어떤 작품이 박물관이나 미술관에 걸려 있는 상태보다 그것이 지금 우리에게 어떻게 쓰이고 있는가에 더 관심을 갖는 것 같아요. 영화나 광고에서도 고전 작품을 오마주하는 경우가 굉장히 많잖아요. 예를 들면 밀레이의 <오필리아>에서 오필리아가 물 위에 떠 있는 장면은 시각적으로 너무 강렬해서 영화나 뮤직비디오에 자주 차용되는데, 그때 무엇을 강조하느냐에 따라 해석이 달라져요. 어떤 경우에는 비극성을 드러내기도 하고, 또 어떤 경우에는 자연 속에 몸을 맡기고 있는 평온한 모습에 초점을 두기도 하죠.
그래서 사람들이 한 작품에서 무엇을 읽어내는지에 관심이 많아요. 같은 그림을 두고도 어떤 사람은 비극을, 또 어떤 사람은 평화를 읽잖아요. 이렇듯 작품이 서로 다른 해석과 영감으로 이어지는 과정을 보는 게 저에게는 굉장히 흥미롭습니다. 사실 우리가 ‘고전은 영원하다’고 말하지만, 지금까지 살아남아서 사람들이 실제로 향유하는 작품은 아주 일부예요. 고전 소설만 봐도 대부분 19세기 이후 작품이고, 셰익스피어나 세르반테스처럼 극히 예외적인 경우를 빼면 그 이전의 작품은 많이 남아 있지 않죠. 결국 지금까지 살아남은 작품들은 분명 현대인에게 어필되는 지점이 있는 거죠. 이런 식으로 고전 작품이 현대인의 감성과 맞아떨어져서 어떻게 계속 영감을 주는지, 저는 그런 것들을 흥미롭게 바라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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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속 경제학』
기자님께서는 경제학을 전공하신 뒤, 경제부 기자를 거쳐 현재는 미술 분야의 기사를 쓰고 계십니다. 전혀 다른 분야처럼 보이는데요. 어떻게 이런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었는지 궁금합니다. 또 미술 전공자가 아니기에 가능한 시선이 분명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림 속 경제학』처럼, 기자님만의 관점에서 바라본 미술의 매력은 무엇인지 듣고 싶습니다.
사실 경제학이라는 학문은 원래 철학에서 출발한 거예요. 인간이 어떻게 하면 행복하게 살 수 있는가를 연구하는 폭넓은 학문이죠. 물질적인 자원뿐 아니라 시간, 노동 같은 것까지 포함해서 자원을 어떻게 배분될 때 가장 잘 살아갈 수 있는가를 다루는 학문이라고 할 수 있어요. 서울대 경제학과의 슬로건이 ‘찬 이성, 더운 가슴’인데, 저도 이때 세상을 바라보는 기본적인 태도를 배운 것 같아요. 기자로 일하면서도 그런 관점이 늘 바탕이 되었습니다. 시간이 날 때 개인적으로 좋아하던 미술 이야기를 블로그에 쓰기 시작했어요. 그때는 지금처럼 대중적으로 미술을 해석해서 풀어내는 채널이 거의 없던 시기라서 생각보다 반응이 컸고, 출판이나 강연 요청도 들어오면서 자연스럽게 미술 분야를 본격적으로 다루게 됐죠. 제가 쓴 『그림 속 경제학』도 사실 미술을 통해서 보는 경제사에 가깝습니다. 중상주의 시대에 권력자 초상화가 있듯이, 미술에는 그 시대의 정치와 경제가 자연스럽게 담겨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미술이 어떻게 사회를 반영해왔는지, 또 예술이 사회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를 보는 데 관심이 있어요.
기자님의 글에서는 뚜렷한 관점과 문제의식이 느껴집니다. 이러한 시선은 어디에서 비롯되는 걸까요? 글을 집필하실 때 가장 중요하게 고려하는 부분과, 새로운 작품이나 전시를 마주할 때 기자님만의 시선이나 던지는 질문이 있다면 들려주실 수 있을까요?
저는 작품을 볼 때 작가의 개인적인 심리나 내밀한 관계에만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그를 둘러싼 시대적·사회적 맥락이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에 더 관심이 있는 것 같아요. 개인사도 분명 중요하지만, 결국 그것도 그 시대의 분위기나 사회 구조와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루이즈 부르주아의 작품을 봐도 그렇습니다. 그의 작업은 흔히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비롯된 개인적인 트라우마로 설명되지만, 저는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느꼈어요. 부루주아가 평생에 걸쳐 아버지를 다루었다는 사실은 단순히 한 가족의 문제라기보다 당시 예술계에 큰 영향을 미쳤던 정신분석학의 흐름과도 깊게 관련되어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 시대의 정신분석학은 ‘아버지’를 사회 질서나 억압의 상징으로 보았기 때문에 그가 이러한 이미지를 계속해서 소환한 것은 개인적 경험과 더불어 사회적 분위기와도 맞닿아 있었던 거죠. 이런 점에서 저는 언제나 더 큰 시대적 틀에서 작품을 바라보는 걸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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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종의 나라』
지금까지 집필하신 수많은 기사 중에서, 기자님께 가장 기억에 남는 글이나 특별히 애착이 가는 기사가 있을까요? 그 이유와 함께 들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제가 쓴 글 가운데 특히 기억에 남는 것은 『혼종의 나라』라는 책에 실린 글들이에요. 이 책은 <문화가 암시하는 사회>에서 연재했던 글들을 묶은 것인데, 그때 썼던 글들은 저 스스로도 만족스러웠던 것 같습니다. 그중에서도 요즘 우리 사회가 부 자체를 선으로 여기는 분위기를 다룬 글이 기억에 남아요. 영화 <기생충>의 ‘부자니까 착한 거지’라는 대사처럼, 오늘날 부를 도덕적 속성과 연결시키는 경향이 강해졌고, 자본주의가 종교화되어 부를 가진 사람들을 종교처럼 숭배하는 현상이 두드러지고 있어요. 발터 벤야민이 말한 자본주의적 죄의식처럼 돈을 많이 벌지 못하면 스스로를 루저라고 느끼게 만드는 구조가 생겨난 것이죠. 경제학에서 돈은 본래 인간의 행복을 위한 수단이었는데, 오늘날에는 이것이 마치 궁극적인 가치처럼 받아들여지는 분위기가 되어 이를 경계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글을 썼습니다.
또 한국 문화의 혼종성에 대해 다룬 글도 기억에 남습니다. 흔히 ‘한국적이 세계적인 것이다’라고 말하지만, 저는 오히려 한국의 정체성 자체가 여러 문화적 요소가 뒤섞여 형성된 하이브리드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혼종성이 혼잡하면서도 동시에 신선한 힘을 가진다고 보았고, 한국이 세계적인 영향력을 갖게 된 배경에도 이런 혼종성이 자리한다고 보았어요. 그런 문제의식을 담은 책이 바로 『혼종의 나라』였습니다.
기자님께서는 주로 기사라는 형식을 통해 독자와 소통하고 계십니다. 실시간으로 반응이나 댓글이 달리는 만큼, 독자들의 반응을 마주하실 때마다 여러 생각이 드실 것 같습니다. 기자님께서는 이러한 반응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계신지, 또 기자님의 글이 세상에 어떤 영향을 미치길 바라시는지 궁금합니다.
실시간으로 독자의 반응을 볼 수 있다는 건 기사라는 형식이 가진 재미인 것 같아요. 책이나 논문처럼 느리게 반응이 오는 것이 아니라 바로바로 피드백이 오는 것이 흥미롭죠. 다만, 문화예술 분야의 글은 정치나 사회 기사처럼 댓글이 많이 달리는 편은 아니라서, 조금 더 다양한 의견이 오갔으면 하는 바람은 있습니다.
저는 제 글을 통해 독자들이 어떤 사안을 한쪽으로 판단하기보다 양쪽의 측면을 함께 바라보고 균형을 잡아보려는 시도를 해주셨으면 좋겠어요. 요즘은 무엇이든 선악을 나누고 단정적으로 프레이밍하는 글이 훨씬 더 많이 읽히고 반응도 크지만 현실의 문제들은 그렇게 간단하게 나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잖아요. 그래서 저는 복잡한 상황은 복잡하게 봐야 한다는 생각으로 글 안에서 여러 측면을 함께 제시하려고 합니다. 독자들이 제 글을 계기로 어떤 사안에 있어서 새로운 측면을 발견하게 되는 것, 그것이 제가 바라는 영향입니다.
대학생 기자단으로서 기사와 카드뉴스 콘텐츠를 제작하면서 ‘어떻게 하면 더 좋은 기사를 쓸 수 있을까’를 늘 고민합니다. 기자님께서 생각하시는 좋은 기사 작성의 핵심 원칙이나, 후배 기자들에게 해주고 싶은 조언이 있다면 부탁드립니다.
좋은 기사를 쓰기 위해 가장 기본적인 원칙은 양측의 입장을 모두 전달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요즘은 확인도 제대로 하지 않은 채 한쪽 이야기만 듣고 기사를 쓰는 경우가 많은데 원래 기사를 쓸 때는 반드시 당사자의 입장을 물어봐야 하고, 연락이 닿지 않는다면 ‘연락이 되지 않았다’고라도 써야해요. 이것이 저널리즘의 규칙이죠. 또 보도자료를 그대로 베껴쓰는 것도 경계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특정 기관의 입장을 그대로 전달하게 되어, 사실상 그들의 홍보 역할을 하게 되거든요. 언제나 비판적 시각을 가지고 교차 확인을 해야 하고, 특히 누군가를 비판하는 글을 쓸 때는 정말 신중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기자의 글 한 줄이 사람을 궁지에 몰아넣을 수도 있으니까요.
제목을 지을 때도 마찬가지에요. 요즘 낚시성 제목이 많잖아요. 내용과 맞지 않는 자극적인 제목을 달아서 클릭을 유도하는 건 단기적으로는 효과가 있을지 몰라도 결국은 자기 명예를 해치는 일이죠. 그렇다고 아주 밋밋한 제목을 달라는 것은 아니고, 내용과 어긋나지 않는 범위에서 사람들의 관심을 끌 수 있는 적정선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예전에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주택 전시를 했을 때 ‘미술관 주택 전시’보다는 ‘아파트 안 살래’ 같은 제목이 훨씬 사람들의 관심을 이끌어낸 것처럼요.
앞으로 문화예술 분야에서 일하고자 하는 학생들이 갖춰야 할 핵심 역량이나 태도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문화예술 분야에서 일하려면 무엇보다 자기 주관과 취향을 분명히 갖는 것이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 취향이나 가치관 없이 타인의 영향으로 선택을 하더라고요. 그런데 문화예술 분야에서는 작품을 볼 때 스스로 질문을 던질 줄 알아야 해요. 앞서 이야기했던 루이즈 부루주아의 사례처럼 아버지에 대한 트라우마라는 설명이 쓰여있다고 해서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정말 전부인지 비판적으로 생각해볼 수 있어야 하죠. 결국 자기 생각이 뚜렷이 있어야 이러한 질문이 나오는 것 같아요.
그렇다고 아집이나 독선적인 태도를 가지라는 뜻은 아니에요. 오히려 새로운 정보와 경험이 들어오면 그에 따라 자신의 입장이 바뀌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해요. 저도 국립중앙박물관 무료화 문제에 대해 처음에는 반대하는 입장이었지만, 영국에 갔을 때 미술관과 박물관을 무료로 운영하는 시스템을 직접 경험하고 나서는 생각이 많이 바뀌었어요. 무료일 때 부담 없이 미술관을 자유롭게 드나드는 경험을 하면서 이 문제는 어느 한쪽으로 단정적으로 말할 수 있는 게 아니라 각 기관의 상황을 분석해서 신중하게 판단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이렇게 유연하게 생각하되, 그때그때 자신의 입장은 또렷하게 세울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앞으로 기자님께서 다뤄보고 싶은 주제가 있다면 어떤 것인지 궁금합니다. 또한 향후 글을 통해 전하고 싶은 메시지나 목표가 있다면 들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앞으로 다뤄보고 싶은 주제로는 달항아리에 대한 거예요. 『혼종의 나라』에서도 짧게 언급했지만, 왜 달항아리가 요즘 들어 한국미의 아이콘이 되었는지를 다시 살펴보고 싶은 마음이 큽니다. 달항아리는 사실 조선백자의 여러 형태 중 하나일 뿐인데 특정 예술가나 미술사학자에 의해 미학적 상징성을 갖게 되었고, 최근에는 하나의 특별한 이미지로 자리 잡았잖아요. 이런 변화가 시대적·사회적 맥락 속에서 만들어진 것이라는 점을 밝히고 싶어요. 그래서 달항아리에 대한 내용을 논문으로도 정리하고 나중에는 책으로도 확장해볼 계획입니다.
